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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래판 썰매와 연탄재 전쟁

사라진 골목의 풍경


서울 한복판, 북아현동의 작은 골목.
경사 30도의 시멘트 언덕길은 아이들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짜릿한 놀이터였다.

뜨겁게 달궈진 시멘트 위,
오후가 되면 열댓 명의 시커먼 개구쟁이들이 빨래판 하나씩을 들고 모여든다.
한 손엔 양초, 다른 손엔 집에서 몰래 들고 나온 빨래판.
양초를 사정없이 문질러 미끄러운 질감을 만든 뒤,
누가 더 멀리, 더 빠르게 내려가느냐를 놓고 신경전과 웃음이 뒤섞인 전쟁이 시작된다.

우리가 만든 건 단순한 ‘놀이’가 아니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것은 개구쟁이들의 상상력이 맞붙은 즉석 창작의 미학이자,
골목이라는 공동체 안에서만 가능했던 일상의 문화였다.

그 시절, 우리를 위협한 건 경쟁이 아니라 ‘양아치’였다.
골목길 집들 문앞에 시멘트로 만들어진 쓰레기통을 뒤지던 한 아저씨가 다가오면
우리는 숨죽이고 그의 움직임을 지켜봤다.
망태기를 멘 그 아저씨는
이 집 저 집 쓰레기통 뚜껑을 열고 닫으며,
익숙한 손놀림으로 집게를 휘둘렀다.
우리의 눈은 빨래판과 양초 위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골목의 침입자였고, 우리는 이 언덕의 주인이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우렁찬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종찬이 너, 빨래판 갖고 언덕에서 썰매 타지 말라고 했지?”

몽둥이 같은 빨래방망이를 들고,
빠글머리에 몸빼 바지를 입은 우리 엄마, ‘서산댁’이 꼬맹이들 앞으로 달려오신다.
골목 전체를 울리는 그 목소리는, 지금 생각해도
어린 악동들에게는 무서운 존재였다.

“야, 빨래판에 골이 하나도 없잖아!
너 들어오면 혼날 줄 알아!”

우리는 하나같이 도망쳤고,
그 도망이 끝날 무렵이면
엄마들의 한숨 섞인 잔소리가 골목을 채웠다.

“이 놈들이, 이걸로 뭘 하겠다고… 빨래판으로, 어휴 속상혀.”

하지만 우리가 정말 하고 싶었던 건
단순한 장난이 아니었다.
그건 나름의 질서와 규칙, 창작과 기지가 살아 있는 놀이였다.
겨울에 눈이 펑펑 내리는 날이면, 그 경사로는 순식간에 ‘북아현동 스키장’이 되었고,
눈싸움은 어느새 연탄재 전쟁으로 번지곤 했다.
하지만 눈에 뭉친 돌에 맞아 누가 코피 터지면 모두 흩어지고,
다음 날이 되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또 모이는 그 골목은
우리 삶의 일부이자 무대였다.

하지만 지금, 그 언덕은 사라졌다.
그리고 그때의 개구쟁이들도 이젠 어디서도 볼 수 없다.
다들 학원 가기 바쁘고, 컴퓨터 앞에 앉아 놀기 바쁘다.
연탄재도, 양초도, 빨래판도 이제는 없다.

추억의 전쟁터였던 그 골목은
지금은 차 한 대가 겨우 빠져나가는 좁은 도로가 되었고,
그 위엔 빌라가 들어섰다.
이제는 그 빌라마저 재개발을 앞두고 있다.
흔적도 없이 사라질 예정이다.

50년이 흘렀다.
그때의 빨래판도, 양초도, 골목도,
서산댁의 외침도 이젠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나는 기억한다.

우리의 놀이는 창작이었다.
빨래판은 도구였고, 골목은 무대였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잊지 않기 위해
나는 지금, 이 글로 그때의 추억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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