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라진 풍경에 대하여
내가 어릴 적, 70년대 중반쯤.
서울 한복판, 언덕 중턱에 자리한 마당 딸린 한옥.
그 집엔 개 한 마리가 살고 있었다. 이름은 ‘꺼실이’.
시커멓고, 쪼끄만 치와와 잡종 암컷. 앞니가 뻐드렁이라서, 웃을 때마다 어쩐지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짓곤 했다. 참 못생겼지만, 그래서 더 정이 갔다.
이름도 그 시절 유행하던 만화 속 캐릭터처럼 ‘꺼실이’라고 붙였다.
꺼벙이와 꺼실이처럼, 우리 꺼실이도 나랑 죽고 못 사는 사이였다.
그땐 마당 있는 집도 많았고, 개들은 집을 지키기보다는 목줄 없이 동네를 마음껏 누비는 자유로운 존재였다.
우리 꺼실이도 예외는 아니었다.
내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동네를 신나게 뛰어다니던 꺼실이가 어디선가 냅다 달려와 품에 안겼다. 나는 그 시커먼 꼬리와 납작한 엉덩이를 보며 세상에서 나만 기다린 친구가 있다는 걸 느꼈다. 그렇게 우리는 함께 뛰어놀고, 함께 잠들고, 함께 자라났다.
그러다 꺼실이가 새끼를 낳았다. 한 마리씩 분양되어 떠났고, 결국 나와 꺼실이, 둘만 남았다.
그러던 어느 여름날, 모든 게 달라졌다.
어느 날, 꺼실이가 보이지 않았다. 어디 간 걸까?
동네를 돌아다니며 불러봐도 대답이 없었다.
그날 저녁, 어머니의 말 한마디가 가슴을 깊게 찔렀다.
“시끄럽고 냄새나고 길에다가 똥을 싸고 더러워서 팔아버렸다.”
나는 말을 잃었다. 엉엉 울었고, 며칠 동안 울음이 멈추지 않았다.
왜 내 친구를, 내게 한 마디 상의도 없이, 그렇게 보내버렸냐고.
그날 이후로, 나는 다시는 개를 키우지 않았다.
개한테 사랑을 주는 게 무서웠다.
시간이 흘러, 이제 나는 어른이 되었고, 누군가 이렇게 묻는다.
“왜 한국 사람들은 개를 먹어요?”
그 질문을 들을 때마다 나는 먼저 꺼실이를 떠올린다.
그 작고 못생겼지만 날 사랑했던 존재를.
그 감정이 먼저 치밀어 올라와, 선뜻 대답할 수가 없다.
하지만 이젠 안다.
그 시절, 개는 단지 친구만이 아니었다. 때로는, 마지막까지 아끼다 꺼내는 생존의 카드이기도 했다.
조선 말기, 나라 형편은 말이 아니었고 사람들은 나무껍질을 삶아 허기를 채웠다.
봄이면 진달래꽃과 풀, 겨울엔 고구마 한 개로 가족이 버텼다.
그런 어려운 시기에, 개는 식구였다.
하지만, 동시에 희생의 순번 마지막에 놓인 존재이기도 했다.
아이의 울음소리가 멈추지 않을 때, 어르신의 손끝이 갈라지고 까칠해졌을 때, 그때서야 개를 잡는다. 그건 야만이 아니라, 눈물 섞인 생존의 선택이었다.
삼복날, 초복·중복·말복에 사람들이 개고기를 끓인 건 그게 미신이어서가 아니다.
그날은 만세력으로 ‘경술일’, 개의 날(戌日)이었다.
더위에 지치고 폐의 기운이 약해지는 시기, 사람들은 음양오행의 원리에 따라 몸을 보양하려 했고, 그 결과가 보신탕이었다.
어려운 그 시절, 한국에 온 프랑스 신부님들도 개고기를 먹었다.
먹을 게 없었고, 고기 한 점이 간절하던 시절이었다.
심지어 고기가 없으면 더 예민해졌다는 이야기까지 전해진다.
가난한 교인들이 정성껏 키운 개를 잡아 신부님께 대접했던 기록도 있다.
이건 한국만의 일이 아니었다.
중국도, 마야도, 프랑스도, 심지어 극지방 탐험가들도, 필요하면 개를 먹었다.
그건 문화가 아니라, 생존의 풍경이었다.
지금은 모든 것이 달라졌다.
한국 사람들 대다수가 이제는 개고기를 거의 안 먹는다.
보신탕집도 많이 사라졌고, 추억 속의 보양식으로 없어지고 있는 중이다.
지금 개는 반려견이자 가족이고, 때로는 아이처럼 여겨지는 존재다.
누군가 내 강아지를 먹겠다 하면, 이젠 상상도 못 할 일이다.
그리고 나도 그 감정을 안다.
꺼실이를 통해 알게 된, 잃어버린 사랑의 무게를.
문화는 죄가 없다.
오해는, 그 문화를 모를 때 생긴다.
누군가 한국의 개고기 문화를 비난할 때, 나는 말해주고 싶다.
그건 음식이 아니었다.
그건 생존의 기억이었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내 어린 시절 깊숙이 묻힌 한 조각의 추억으로 남아 있다.
